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친차 제도 전쟁 (문단 편집) == 배경 == 19세기 초중반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들의 일제 독립 이후로도 스페인 정부는 이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길 희망했다. 개전 시점인 1864년 기점으로 스페인은 독립한지 40년이 지난 [[페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독립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명분과 실질적으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현실은 잘 알고 있었기에 스페인은 현실적으로 이들 지역에 남아있는 스페인 국민들 및 그 재산권의 보호, 그리고 신생 독립국가들이 진 부채의 해결을 우선시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목적에서 1862년, 스페인 본국은 4척의 소선단을 [[태평양]] 지역으로 파견했다. 루이스 핀손 제독이 지휘하는 이 선단은 공식적으로 태평양 연안 지역의 학술적 탐사와 우호친선 방문이 목적으로 하였다. 1863년 4월, 이들은 [[칠레]]에 도착하여 칠레 정부의 환대를 받았다. 페루와 달리 칠레는 스페인 본국에서도 독립을 인정한 상태였기에 이러한 친선방문에는 문제가 없었다. 물론, 칠레 정부가 이들을 경계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속으로 경계할 정도였다. 칠레의 환대를 받은 스페인 선단은 이후 북상하여 [[미국]] [[캘리포니아]]까지 올라갔다. 문제는 이 시점에서 미묘한 사건이 터졌다. 1863년 8월 페루의 람바예크에서 스페인 거류민과 페루 현지인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스페인인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안그래도 페루에 대한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던 스페인 본국은 이를 좋은 개입명분으로 보고, 캘리포니아까지 올라간 핀손 선단을 급거 페루로 내려보낸다. 핀손 제독은 스페인 정부의 이름으로 페루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으나 페루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핀손 제독은 본국과 상의 없이 협상채널을 위한 무력행사를 결의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